Part2. 복음 부흥: 복음 중심적 부흥을 준비하라

1. 이 시대에도 정말 부흥이 필요하다.

  • 공동체적 복음 회복이 종종 ‘부흥’이라고 불린다.
  • 부흥은 성령께서 일하셔서 인간의 그릇되고 고질적인 사고 체계인 자기의와 부채 의식 등을 몰아내고 깨뜨리시는 지속적인 활동이다.

부흥에 대한 비판과 부흥주의의 위험성

부흥주의에 대한 비판

  • 부흥주의자들은 전통과 교리, 교회중심 보다는 개인의 결단과 개인의 급격한 회심의 경험을 강조하였다.
  • 교리적 건전함과 삶의 거룩함보다 감정적 체험이 더 중요시 되었다.
  • 이렇듯 비판적이었던 스프레이그와 같은 사람과 달리 아치볼드 알렉산더 교수는 부흥의 부정적 영향을 부흥 자체의 문제로 보지 않고, 부흥과 교회중심을 함께 가야할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의 부흥주의

오늘날 부흥주의가 감정적, 체험중심적이라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복음 부흥 사역에 대한 기본적 통찰과 실행은 2가지 이유에서 옳다.

  • 오늘날 부흥은 우리 시대에 적합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 예전과 달리 기독교 전통이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의 문화의 중심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전통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접근 방법이 효과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 중심적 모델은 사회의 다원화로 인해 붕괴되었다.
    • 오늘날에는 과거와 같이 신념 체계를 상속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 많은 신념체계와 세계관의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를 선택하는 환경에 놓여있다.
  • 복음 부흥은 마음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 구원에는 외적인 표지와 지적인 동의를 넘어서 ‘마음의 정함’이 필요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 성경은 도처에서 진정한 회개에 대해서 말하며 회개에는 우리의 지성, 의지, 감정 곧 마음의 변화가 일어남에 대해서 말한다.
    • 에베소서 3장의 ‘위대한 기도’에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인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계시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미 믿고 있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곧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 바울이 성령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1:18)’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3:17-18)‘을 깨닫기를 간구했던 이유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을 믿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서 그 행하신 일의 무한한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깨닫고 경험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균형 없는 부흥주의는 부흥주의에 대한 우려와 같이 기성 교회의 사역을 저해할 수 있으나 은혜의 ‘일반적 수단’을 통해서 복음을 공동체적, 개인적으로 회복하는 균형 잡힌 부흥주의는 그 자체가 교회의 사역이 된다.


2. 이것이 바로 복음적 부흥이다.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지는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 반응하는 세 가지 길

하나님께 반응하는 방법은 언뜻보기에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방법은 ‘비종교적’ 방법과 ‘종교적’ 방법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복음의 방법이 있다.

바울의 언어로 이러한 세 가지 사지 삶의 길을 살펴보자면 아래와 같다.

  • 문자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 ( 비종교 )
  • 육체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들 ( 종교 )
  •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 ( 복음 )

모든 사람에게 제 3의 길로 설교하기

복음을 전할 떄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을 구분할 뿐 아니라 자기 구원의 종교적 수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감사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인지의 차이를 구분하게 해야 한다. 왜 그런것인가?

  • 이름뿐인 신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마치 탕자비유의 ‘큰아들’ 처럼.
  • 진정한 그리스도인들 중 상당수가 큰아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많은 포스트모던주의의 사람들이 매우 종교적인 교회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은혜를 외치는 것이 포스트모던주의의 사회에서 방탕과 무규범 곧 율법폐기주의를 부추길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은혜의 소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소식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율법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수 많은 비종교적 사람들이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인간의 노력에 근거한 자기 구원 전략의 서로 다른 표현일 뿐이며 이것에서 벗어나 기쁨과 능력과 열정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울 유일한 길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도덕주의적 행동 변화

도덕주의의 행동 변화의 동기는 ‘교만과 두려움’ 이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주된 이유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거나 자존감과 자기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그 동기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도덕적이 되도록 학습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순종하지 않는다. 도덕주의적 행동 변화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행동이 다른 양상을 띠도록 할 수는 있으나 결코 진정으로 변화되도록 사람을 녹여내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수면 위에서는 그럴 듯하게 행동하지만 수면 아래에는 엄청난 자기중심성이 숨어 있으며, 이는 뒷담화와 간음, 극심한 미움과 다툼, 판단하는 태도 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도덕주의는 철을 구부려 모양을 바꿀 수는 있으나, 복음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녹여 새로운 모양이 되게 할 수는 없다.

복음적 행동 변화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금할 것을 격려하고 있지만 그는 이를 권위로서 찍어누르는 방식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처벌로서 협박하지 않았다. 감정을 자극하거나 가난의 비참과 고통을 묘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바울은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우리를 가르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복음이 먼저 나와 씨름해야 하고 깊이 자리잡게 해야 한다.
  • 인색함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
    • 우리를 위해 자신의 부요를 쏟아 부어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분의 십자가가 우리를 향한 돌보심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 나쁜 결혼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
    • 그리스도의 급직적인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신부인 교회를 위해 행하신 희생적인 사랑을 기억할 떄 우리는 정욕과 싸울 진정한 힘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만족을 성적인 충족에서 찾지 않게 된다.

성령에 의해 복음이 깨달아질 때 복음은 도덕적 행동 변화의 2가지 동인인 교만과 두려움을 모두 제거한다.

  • 복음은 교만을 부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쳐야 할 정도로 우리가 길 잃은 존재였음을 복음 안에서 보기 때문이다.
  • 복음은 두려움을 해체한다. 복음을 통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의 중요성

우상숭배는 다른 모든 죄의 뿌리가 된다. 사람들은 우상을 잃을 때 그들의 삶이 붕괴된다. 복음 부흥을 위해서 설교하고 상담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된 우상들에 대해 항상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를 통해 도덕주의적 행동 변화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를 예방할 수 있다.

모임 준비

a. 인상 깊었던 부분 바울은

b. 생각/고민 해 볼만한 부분

c. 기억에 남는, 좋았던 문장